흐르는 강물 손
Date 2024-05-03 14:35:24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6
손 현 철
교수
전남대학교 생명과학기술학부
hfrancis@jnu.ac.kr

들어가며

  나의 이야기가 글로 만들어져 누군가 읽게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원고 청탁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지금, 아주 멋지고 훌륭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지만, 나의 글재주가 과한 욕심을 채우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부터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전남대학교에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지금, 지난 시간을 돌아볼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멘델이 될 뻔한 건에 대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과학만을 좋아했던 나는 과학자의 삶이 실제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미래의 나는 당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과학을 즐기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과학 잡지 ‘뉴턴’을 보면서 천문학자가 되어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우주의 신비를 알아내고 싶었고, 한의원에서 가면 한의사가 되어 천연물 과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를 보며 물리학을 하고 싶기도 했지만,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전공을 선택할 때는 알 수 없는 힘이 생명과학을 선택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천주교 모태신앙으로 성당을 다닐 때 주변 어른들께 “앞으로 신부(father, priest)가 되면 되겠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신학교를 거쳐 신부가 되면 나도 멘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나는 이미 생명과학의 길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걸음

  과학은 좋지만, 공부는 싫었던 나는 학부 과정 때 외부 활동과 노는 것에 대부분 시간을 보냈으니, 진짜 생명과학도의 삶은 대학원 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5년간의 대학원 생활은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내 삶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연구실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지만, 나 역시 실패의 늪에서 깊은 좌절감에 허우적거리던 시간이 있었다. 대학원에서는 입체 구조를 기반으로 효소 단백질을 개량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산업 미생물학과 대사공학에 이용되는 효소 단백질의 대량 생산 시스템을 구축해 고순도 단백질을 확보하고, 단백질 결정을 만들어 X선 회절 실험으로 입체 구조를 규명하고, 효소 단백질의 입체 구조와 생물정보학 데이터를 분석해 개량 전략을 수립한 후 만들어진 돌연변이 효소의 생화학적 특성 변화를 분석하는 연구 과정에서 내가 수행하는 실험의 세부적인 모든 단계에서 실패했다.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아 연구 주제까지 계속해서 바뀌는 수년 동안 실패가 당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완성된 결과물을 보았을 때는 오히려 그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실패한 결과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나를 성장시켜 실험을 디자인할 때 깊이를 더해주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고, 또 후배들이 오랜 실패에 좌절할 때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더 실패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할 만큼의 여유로 발전했다. (라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길 바란다.) 전반기에는 많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후반기의 뒷심과 주변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효소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연구실의 PET 플라스틱 분해 연구 초기에 힘을 보태며 박사 학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지금도 실패를 거듭하며 연구에 젊음을 쏟아내고 있는 모든 연구자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 실패들이 빛을 보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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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벚꽃이 만개한 경북대학교의 4월. 

 

두 번째 걸음

  학위 과정에서 비 모델 효모 균주인 Yarrowia lipolytica를 이용해 지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효소의 입체 구조를 규명하고 개량하는 과제에 참여하며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 개량 효소 단백질을 실제 효모 균주에 도입해서 효소의 성능을 확인하는 연구 과정을 보면서 미생물을 직접 다루는 방식으로 연구를 확장하고 싶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응용산업미생물 연구실에서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학위 과정을 하면서 효소는 다룰수록 까다롭고 신기한 존재라 생각했는데, 미생물을 다루는 것은 효소와는 다른 까다로움이 있었다. 효소 연구의 경우 신선도가 매우 중요해서 모든 실험을 한 호흡에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그 때문에 연구자의 생활 리듬이 효소 생산과 이후 실험에 자연스럽게 맞춰지게 된다. 미생물 실험도 마찬가지로 연구자의 모든 생활 리듬이 세포 성장에 맞춰지게 되는데, 효모는 성장 속도가 느려 더 오랜 기간 보살펴야 한다. 난 반려동물이 없지만,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들의 삶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모델 효모 균주인 Saccharomyces cerevisiae에 비해 Yarrowia lipolytytica는 최근에 연구가 시작되었고, 상대적으로 연구된 바가 적어 더욱 깊은 관심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효모를 이용한 다양한 물질 생산 연구와 함께 내가 주로 연구했던 주제는 난분해성 플라스틱인 폴리에틸렌의 생물학적 분해와 관련된 연구였다. 내가 팀에 합류할 때 폴리에틸렌을 분해하는 효소가 선별되고 있었고, 효소를 이용한 플라스틱 분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특정 효소가 폴리에틸렌을 정말로, 그리고 잘 분해하는지 확인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폴리에틸렌은 PET 플라스틱과 달리 특정한 단량체로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서 분해능을 측정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이 때문에 다양한 분석 기법을 활용해 간접적으로 분해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우리 팀은 효소 단백질에 의해 분해된 폴리에틸렌을 정밀하게 검증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고안했고, 이는 기존의 다른 기법들과는 달리 정량적인 분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분해 미생물 개발로 확장할 수 있다. 또한, 폴리에틸렌 플라스틱의 경우 분해 경로가 복잡해 여러 효소 단백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하므로 새로운 전략이 더욱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수행했던 폴리에틸렌 분해 관련 연구들을 논문으로 보고하기 위해 마지막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좋은 논문으로 완성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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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봄이 찾아오는 KIST에서. 

 

효소와 효모가 만나는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술을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술을 직접 만들어 마시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술을 직접 만들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술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처음 서울로 갈 때 내가 무엇을 생각하든 다 있으리라 생각하며 내 손으로 좋은 술을 빚어 보리라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 있었고, 마포에 있는 삼해소주가를 만났다. 술을 만들고 마시는 데 진심인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새로운 얼굴인 나에게 온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생명과학 관련 일을 한다고 답했을 때 눈을 빛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야기가 깊어지며 효소와 효모를 연구한다는 것까지 듣고 나면 모두 내가 양조 전문가라 ‘착각’했다. 술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필수 요소가 곡물의 당화에 필요한 효소와 당을 소비해 알코올을 만드는 효모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나에게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앞에 두고 Saccharomyces cerevisiae와 Yarrowia lipolyitica의 차이를 설명하고, 당화 효소의 구조적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해 pymol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라 퇴근 후 짬을 내 양조 과학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는 만큼 설명하고, 모르는 건 공부하고, 잘못 전한 과학적 내용을 뒤늦게 연락해 수정하는 과정을 겪으며 일상에 맞닿아 있는 과학은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더 많은 사람이 평범한 삶 속에서 작은 호기심을 충족하며 과학을 즐기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지, 또 효소와 효모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눈을 반짝인 것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어 한국 술과 관련된 연구를 할 기회가 올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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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누구보다 효소, 효모에 진심인 사람들과 함께. 


마치며

  먼저 BT News에 글을 기고할 기회를 주신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엄영순 박사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나의 지난 연구 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아낌없는 조언을 주신 경북대학교 김경진 교수님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효모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고려대학교 이선미 교수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을 남기고 싶다. 경북대학교 구조분자생물학연구실, 경북대학교 미생물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청정에너지연구센터의 응용산업미생물연구실에서 함께 삶과 연구를 이야기하며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해주신 모든 분께 또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광주에서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곁들여 아름다웠던 과거와 행복한 지금, 찬란할 미래를 나눌 수 있길 고대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목표다. 새로운 이곳에서는 내가 또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