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Lab Girl
Date 2024-05-03 14:27:48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8
손 보 람
박사후연구원
한양대학교 생명공학과
boramson@hanyang.ac.kr

들어가며

  막 원고의뢰를 받았을 때, 이제 막 도움닫기를 시작하는 병아리 연구자로서 나 같은 신출내기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원고 작성을 위해 지난 BT스토리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니, 이런 걱정을 한 사람이 나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선배 연구자들이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같은 후배들은 그런 꿈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부족함 많은 나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일말의 희망이자 응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한국생물공학회에서 BT News를 건네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즐겁게 읽는 모습을 상상하며 펜을 든다.

 

될성부른 나무를 꿈꾸는 떡잎

  고등학생시절 누구나가 그렇듯 나도 선생님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내가 유난히 잘 따랐던 생물선생님은 많은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포근한 어머니 같은 분이셨는데,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서 나는 생물이라는 과목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학창시절 내내 화가, 한의사, 사업가, 요리사 등등 다채롭게 펼쳐지던 나의 장래희망이 과학자로 정착하며 나는 서울대학교 동물생명공학전공에서 배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배움이 지속될수록 생명공학 전반에 걸쳐 더 큰 흥미를 가지게 된 나는 몇차례의 학부연구생(인턴연구원) 경험을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박태현 교수님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태현 교수님은 미생물 및 동물세포 엔지니어링을 바탕으로 재조합 단백질 기반의 분자생물학 연구부터 인간의 오감을 다루는 센서의 영역까지 다방면의 융합연구를 선도하고 계셨는데, 학내에서는 이러한 연구업적에 더불어 뛰어난 강의력과 특유의 입담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하신 스타 교수님이셨다. 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높은 경쟁을 뚫고 박태현 교수님 연구실에서 학위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고 비로소 꿈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87ef804c213ff6bd32741a95b835e6ef_1714712736_1175.jpg
2015년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박태현 교수님 연구실 스승의 날.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

  학부에서 배운 생리학, 분자생물학, 유전학 등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 공학이라고 하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 나는 석박사통합과정 7년 동안 다양한 세포 및 나노 공학과 접목된 내용을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랩에서는 자성박테리아(magnetic bacteria)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성박테리아 유래 자성나노입자(magnetic nanoparticles, MNPs)의 응용방향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는데, 내가 그 적용분야 중 하나로 줄기세포(stem cells)를 선택하면서 우리 랩에 처음으로 줄기세포 배양시스템을 셋업(set up)하게 되었다. 접근이 보다 쉽고 간단한 많고 많은 적용 대상을 제쳐두고 구태여 시스템을 처음부터 갖추어야 하는 줄기세포를 이용하고자 마음먹은 데는 나름의 연구적 배경이 있었지만, 품을 들여 새로운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처음에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혼자서라면 쉽게 포기했을 테지만, 물심양면으로 믿고 지지해주신 지도교수님과, 함께 애써준 우리 랩 사람들, 그리고 같은 학부 김병수 교수님 연구실 구성원들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우리 랩에서도 인간배아줄기세포(human embryoinic stem cells, hESCs), 인간중간엽줄기세포(human mesenchymal stem cells, hMSCs), 인간유도만능줄기세포(human induced pluripotent stem cells, hiPSCs)등 다양한 줄기세포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기반을 처음부터 꾸려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도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연구는 혼자서는 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배우게 되었다. 일의 효율성 측면을 고려한다면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자기 일에 몰두할 때 시간과 노력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곁의 사람들은 자신의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나에게 기꺼이 내어 주었고 ‘내’가 아닌 ‘우리’는 함께 작지만 중요한 결과들을 차곡차곡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87ef804c213ff6bd32741a95b835e6ef_1714712829_1872.jpg
2015년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박태현 교수님 연구실 홈커밍데이. 

 

세상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

  학위과정동안 내 지도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연구자의 길을 걷길 바라는 아버지 같은 마음을 담아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시곤 했는데, 그 가운데 시간이 거듭될수록 더욱 생각이 나는 말씀이 있다. “우리 학생들은 똑똑해서 지금까지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왔겠지만, 이제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스스로 문제 내고 풀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좋은 문제를 낼 수 있도록 통찰을 키워야 한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수많은 것을 배웠지만, 결국 연구자는 세상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가치 있는 물음표로부터 의미 있는 느낌표가 나온다는 가르침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연구자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박사졸업 이후 나는 출산과 육아로 2년간 경력이 단절되었지만, 언제나 길은 있었고 감사하게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를 거쳐 한양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한양대학교 박희호 교수님 연구실에 온 지는 이제 만 2년이 되어 가는데,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준 마치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경력 단절의 기간 동안 지난 연구를 정리하고 후배들의 연구를 함께 살피면서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나름의 애를 썼지만, 손에서 파이펫을 놓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커져가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던 나에게 박희호 교수님 연구실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이곳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다양한 연구 주제로 나의 연구 시야를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물론이고 연구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장차 독립된 연구자로 우뚝 서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 등에 대해 매번 새롭게 배우고 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름의 다양한 물음표를 던져보며 좋은 연구자로 성장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87ef804c213ff6bd32741a95b835e6ef_1714712937_6292.jpg
2022년 한양대학교 생명공학과 박희호 교수님 연구실 한국생물공학회 참석.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꿈에 닿아

  나는 학위과정 동안 열심히 수학했던 나노 공학을 기반으로 하는 줄기세포 연구에서 꾸준히 뻗어 나가, 현재는 줄기세포 활용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오가노이드를 이용하는 연구분야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 중이다. 뇌 오가노이드를 이용해 비단 뇌와 관련된 질병 뿐 아니라 체내 다른 기관과 뇌와의 복잡한 상관관계를 연구할 수 있다는 무궁한 점이 이 연구 분야의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오가노이드를 이용해 장차 다양한 질병 모델을 구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효과적인 치료개념을 함께 제시하기 위해 나는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면역세포치료제(immune cell therapy) 연구 분야와 약물전달(drug delivery) 분야에 대해서도 부지런히 배우고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모든 연구 분야를 섭렵할 것처럼 호기롭게 보이는데, 연구를 수행하면 할 수록 연관된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호기심이 생기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길 때마다 매번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가 되어 나의 연구 바운더리(boundary)를 넓혀 나가는 과정은 분명 쉽지 않다. 다만, 배우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이고, 성장한다는 쾌감은 나에게 꾸준한 성취감을 주는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제다.

  누구에게나 험난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자신만의 무기가 있다. 남들보다 언제나 한 발자국 씩 느렸던 내가 가진 자신 있는 무기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가는 것이라고 나 스스로는 믿고 있다. 느리지만 멈추지는 않는 것, 언제나 게을리 하지 않고 나만의 방향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알을 깨고 계속해서 세상으로 나가보려 한다.

 

87ef804c213ff6bd32741a95b835e6ef_1714713758_5558.jpg
2022-2023년 다양한 학회에서 연구성과 발표. 


87ef804c213ff6bd32741a95b835e6ef_1714713972_0787.jpg
2024년 Harvard Medical School Brendel’s lab 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