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공학 도전 50년, 그리고 암 연구
Date 2023-10-02 18:06:10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248
이선복
포항공과대학교 화학공학과
한국생물공학회 제16대 회장
sblee@postech.ac.kr
  안녕하세요? 2009년에 학회장을 맡았던 이선복입니다. 한 달 전쯤 BT News에서 원고청탁을 해왔는데 전임 회장님들이 쓴 글을 함께 첨부해 보내주었습니다. 2019년 2월 은퇴한 후에는 학회참석을 못 하여 오랜 기간 인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BT News에서 한국생물공학회 회원님들께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전임 회장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물공학 관련하여 제가 걸어온 과거 이야기와 요즘 근황을 몇 가지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흘러 제가 한국과학원 (KAIS; 현 KAIST) 생물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 지 벌써 47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생명과학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KAIS 설립 당시의 이름은 생물공학과였는데 우리나라에 ‘생물공학’이라고 하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이 이때입니다. 전국 유일의(어쩌면 세계 최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듯 모를듯한 낯선 이름을 가진 KAIS 생물공학과는 제가 입학할 당시 모집인원이 15명이었고 입학생의 학부전공 구성은 미생물학, 식물학, 농생물학, 농화학, 약학, 식품공학, 화학공학 등 생물관련 이학과 공학이 합쳐진 매우 혁신적인 형태였습니다. 공학 전공을 한 저는 입학 후 생화학, 미생물학을 따라가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쌓은 생명과학 기초지식은 후일 저의 연구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물공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학부 4학년 1학기의 한 세미나 강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가면서 하는 강연이라는 뜻의 ‘윤강’ 이라는 1학점짜리 과목의 연사로 당시 KAIS 생물공학과 교수이셨던 유두영 교수님 (현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명예교수)께서 <Biochemical Engineering: Trends and Recent Advances>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셨고, 이 강연을 듣고 저의 진로를 생물공학으로 정하고 KAIS 생물공학과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후일 유두영 교수님의 연구업적 목록을 보고 이때 강연하신 내용이 1974년 한국화학공학회지에 리뷰논문으로 투고하신 것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논문을 보면 지금도 그때의 감흥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혹시 이 논문을 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유두영 교수님의 강연은 저에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biochemical engineering’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미국 등 선진국에서 화학공학의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고 있는 학문 분야로서, 이 분야 연구를 통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식량, 질병, 환경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소개하였는데 그때까지 배워왔던 화학공학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마치 미지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었고, 이것을 전공하면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인류를 구하는 최강전사 ‘울트라맨’이라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강연으로 운명처럼 시작된 저의 생물공학 도전은 유두영 교수님의 1호 생물공학 박사가 되게 만들었고, 그 후 한국과학재단에서 지원하는 1회 박사후연수과정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며(당시 선발 인원은 총 12명이었고 그중 10명이 외국박사학위 소지자였습니다), Caltech에서는 1호 한국박사학위 post-doc이 되었으며, 유전공학연구센터 (현 KRIBB) 창립멤버를 거쳐 포스텍 1호 생물공학전공 교수가 되게 되었습니다. 국내 1호 생물공학 박사이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생물공학회 출범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되었고, 1996년에는 한국생물공학회 영문지의 초대 편집위원장을 맡아 BBE를 출범시켰습니다. (영문지 편집위원장은 BBE가 SCIE에 등재되고 학회장을 맡을 때까지 13년 동안 역임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저의 생물공학 도전은 입문 20년 후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대를 맞이하여 무언가 후대에 길이 남을 수 있는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고온 고압 등의 환경에서 자라는 극한환경미생물 (extremophile) 연구였으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고세균 (Archea)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포스텍에서 정교수 승진과 함께 정년보장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논문 내기 어려울 줄 알면서도 과감히 이 분야를 선택하였습니다. 고온 고압에서 반응하는 새로운 바이오촉매를 개발하여 생물공정이 취약한 열과 압력의 한계를 극복해 보겠다는 공학적인 생각, 그리고 초기 지구 환경과 유사한 극한환경에서 서식하는 미생물을 연구해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겠다는 순수과학적인 생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연구테마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고세균의 배양이 어렵고, 고세균 유전자가 박테리아에서 잘 발현되지 않으며, 진핵세포처럼 post-translational modification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고세균의 당대사경로가 교과서에 나오는 EMP, HMP와 상당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고세균 연구를 통해 새로운 당대사경로와 이에 관여하는 효소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효소기능예측을 위한 많은 database와 knowhow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orphan gene의 기능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세균 유전자 중에 homolog가 사람에게도 있으며 특히 암 환자에게서 많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는 것이 있어 혼자 틈틈이 연구를 했는데, 제가 포스텍을 은퇴할 때까지 반응경로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homolog가 암세포의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연구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은퇴 후 다시 계속 연구를 한 끝에 마침내 고세균유래 효소의 기능을 알아낼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또 한 번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바로 고세균유래 효소의 기능을 기반으로 한 암세포 대사연구에 도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의학생물공학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저의 아들에게도 면역항체공학 연구를 권유하여 지금 미국 동부의 한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혹시 유학이나 post-doc에 관심이 있으신 회원님이 계시면 jiwon.lee@dartmouth.edu로 연락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질병연구에 생물공학자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제 나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70에는 뜻대로 행하여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공자님 말씀에 따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세균 효소 연구에서 인간 homolog 연구로 바뀌자 모든 것이 어려워졌고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미생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복잡한 인간 유전자의 발현조절 과정과 생성된 단백질의 추가적 modification은 단백질 기능 예측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인간 유전자의 경우 한 유전자가 하나 이상의 단백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경우의 수는 곱으로 늘어났습니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쉽게 풀릴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리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한 인간 유전자의 기능과 대사경로를 알아내는 일은 시스템공학적 접근이 가능한 생물공학자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발표된 실험 결과들을 설명할 수 있는 예측 반응경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반응이 포함되자 암세포의 대사경로가 정상세포의 대사경로와 크게 달라지게 되고, 1931년 노벨상을 받은 Warburg가 100년 전 발견해 암세포의 대표적 특성으로 여겨지고 있는 ‘Warburg effect’를 정량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전자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이 두 가지 반응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최근에는 또 다른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에 비해 성장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더 많은 ATP가 생성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풀려야 비로소 암 정복이 가능하게 될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중요한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저의 분석에 따르면 암세포 환경에서 ATP를 만드는 유전자가 따로 있으며 암세포 환경에 따라 생성되는 ATP의 수가 변합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근황입니다. 앞으로 더 연구해서 연구결과가 확실하다고 판단이 되면 저의 생물공학 입문 50주년이 되는 2026년 봄에 한국생물공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그때 계속해서 후속 이야기를 전해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회원님들의 앞날이 한국생물공학회와 함께함으로써 더욱 빛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