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 바이러스
Date 2021-10-13 00:34:00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34
김응빈
교수
연세대학교 시스템생물학과
eungbin@yonsei.ac.kr

30년 넘게 실험실에서 박테리아와 깊은 교제를 해오다가, 10여 년 전 우연한 기회 에 한 철학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얘기가 잘 통해서 커피 한 잔의 여 유 속에 담소를 나누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만남이 계속되면서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공부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근본 적으로 같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렇 게 만남이 깊어질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각자가 공부하는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소통의 말솜씨가 늘면서, 시나브로 사고(思考)의 융합이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 경험의 짜릿함을 이 글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바이러스가 생물인가요? 

어느 날, 그 철학자가 불쑥 던진 질문입니다. ‘예’, ‘아니요’로 명쾌히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기에 순간 고민을 하다가, 철학자이니까 그 스스로 답을 찾으리라는 기대 속에 다음과 같이 다소 애매하게 설명하면서 그의 반응을 보기로 했습니다. 

 

“흔히 바이러스는 세포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생물로 간주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숙주) 안에서는 물질대사와 증식을 수행하기 때문에 분명 무 생물도 아니죠. 숙주 세포 밖에서 활성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 할 수 없겠죠. 그러나 일단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 바이러스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빠르게 증식하니까 이때는 살아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설명에 다 듣고 난 그 철학자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이러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즉 생명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군요. 

 

다시 말해 ‘이다’와 ‘아니다’, ‘있다’와 ‘없다’를 넘나드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나친 비약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와 유사하게도 예술작품도 ‘경계의 존재 방식’을 가 질 뿐만 아니라 ‘기생적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애당초 그는 바이러스에 대한 생물학적 질문이 아니라 기발한 융합의 화두를 던졌음을. 하지 만 예술을 바이러스에 비교하는 건 지나친 무리수라는 생각이 들었죠. 솔직히 예술가는 물론이고 예술 애호가들이 들 으면 격분할까 봐 내심 겁도 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섣부른 우려는 이내 지적 유희의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술작품과 쓰레기 마르틴 키펜베르거 (Martin Kippenberger, 1953~1997)라는 독일 예술가가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인데, 2011년 독일의 한 미술관 전시회에서 발생한 작품 훼손 사고로 그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 기 시작할 때>라는 작품은 고무 물받이가 있는 목제 구조물입니다. 더러운 물이 고였다 증발한 것을 표현하고자 키펜 베르거는 일부러 얼룩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운 사고의 실마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아침 일찍 전 시관을 청소하던 성실한 관리인이 그 얼룩을 그만 지워버리고 만 겁니다. 그의 눈에는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닦아내야 할 더러운 오점으로 보였던 것이죠. 이처럼 작품을 폐품으로 오인해서 생기는 웃지 못 할 해프닝 소식은 지금도 잊을만하면 들려오곤 합니다. 아마 앞으 로도 계속 그럴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혹자는 누군가의 예술적 안목 부족이나 지나치게 난해한 작품 따위를 원인 으로 지목하지만, 근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예술작품의 독특한 존재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술작 품과 바이러스의 비교가 이런 예술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이러스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출귀몰 전파되는 감염성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신물이 나게 체험했듯이 말입니다. 둘째, 숙주 세포 내에서만 증식하는 기생성입니다. 숙주가 없으면 바이러스는 그저 핵산을 둘러싼 단백질 입자에 불과합니다. 셋째, 숙주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어떤 식으로든 숙 주를 변화시킨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우리 면역계는 과거에 침투했던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여 기억하 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이러스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몸은 같다고 할 수 없겠지요. 보통 은유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하나는 진부하지 않은 ‘참신성’이고, 다른 하나는 새롭 고 낯선 사태의 병치에도 불구하고 확보되는 ‘유의미성’이죠. ‘예술작품은 바이러스다’라는 은유의 신선함은 복잡성 면 에서 생명계의 최하위 종과 최상위 종의 산물, 곧 생명계의 양극단이 극적으로 만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유의미성에 대해서는 이어서 별도로 설명하겠습니다. 예술작품과 바이러스 이제 실제 바이러스에 빗대어 예술작품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술작품도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이 전염력의 원천입니다. 매력적인 예술작품은 작품을 접하는 주변 사람을 감염시키죠. 예술 바이러스의 숙주인 인간은 이 매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전염은 동시대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 가고, 역사적으로 전승됩니다. 예술작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 부유하다가도 숙주인 인간을 만나는 순간, 마치 바이러스 처럼 돌변해서 숙주를 감염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2006년 큰 인기를 얻었던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 제목은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나친 비약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와 유사하게도 예술작품도 ‘경계의 존재 방식’을 가 질 뿐만 아니라 ‘기생적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애당초 그는 바이러스에 대한 생물학적 질문이 아니라 기발한 융합의 화두를 던졌음을. 하지 만 예술을 바이러스에 비교하는 건 지나친 무리수라는 생각이 들었죠. 솔직히 예술가는 물론이고 예술 애호가들이 들 으면 격분할까 봐 내심 겁도 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섣부른 우려는 이내 지적 유희의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술작품과 쓰레기 

 

마르틴 키펜베르거 (Martin Kippenberger, 1953~1997)라는 독일 예술가가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인데, 2011년 독일의 한 미술관 전시회에서 발생한 작품 훼손 사고로 그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 기 시작할 때>라는 작품은 고무 물받이가 있는 목제 구조물입니다. 더러운 물이 고였다 증발한 것을 표현하고자 키펜 베르거는 일부러 얼룩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운 사고의 실마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아침 일찍 전 시관을 청소하던 성실한 관리인이 그 얼룩을 그만 지워버리고 만 겁니다. 그의 눈에는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닦아내야 할 더러운 오점으로 보였던 것이죠. 이처럼 작품을 폐품으로 오인해서 생기는 웃지 못 할 해프닝 소식은 지금도 잊을만하면 들려오곤 합니다. 

아마 앞으 로도 계속 그럴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혹자는 누군가의 예술적 안목 부족이나 지나치게 난해한 작품 따위를 원인 으로 지목하지만, 근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예술작품의 독특한 존재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술작 품과 바이러스의 비교가 이런 예술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이러스의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출귀몰 전파되는 감염성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신물이 나게 체험했듯이 말입니다. 

둘째, 숙주 세포 내에서만 증식하는 기생성입니다. 숙주가 없으면 바이러스는 그저 핵산을 둘러싼 단백질 입자에 불과합니다. 

셋째, 숙주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어떤 식으로든 숙 주를 변화시킨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우리 면역계는 과거에 침투했던 특정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여 기억하 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이러스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몸은 같다고 할 수 없겠지요. 보통 은유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하나는 진부하지 않은 ‘참신성’이고, 다른 하나는 새롭 고 낯선 사태의 병치에도 불구하고 확보되는 ‘유의미성’이죠. ‘예술작품은 바이러스다’라는 은유의 신선함은 복잡성 면 에서 생명계의 최하위 종과 최상위 종의 산물, 곧 생명계의 양극단이 극적으로 만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유의미성에 대해서는 이어서 별도로 설명하겠습니다. 

 

예술작품과 바이러스 

 

이제 실제 바이러스에 빗대어 예술작품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술작품도 강한 ‘전염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이 전염력의 원천입니다. 매력적인 예술작품은 작품을 접하는 주변 사람을 감염시키죠. 예술 바이러스의 숙주인 인간은 이 매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전염은 동시대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 가고, 역사적으로 전승됩니다. 

예술작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 부유하다가도 숙주인 인간을 만나는 순간, 마치 바이러스 처럼 돌변해서 숙주를 감염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2006년 큰 인기를 얻었던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 제목은 그 내용과 상관없이 참으로 절묘하고 적확한 단어의 조합입니다. 

 

현재 지구상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직접 만나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음 악은 어떠한가요? 생존 당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서만 알려졌던 그의 음악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00년 이 지난 지금,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토벤 음악이 시공을 뛰어 넘어 살아남아(생존), 때에 따라서는 편곡되기도 하면서(진화), 널리 퍼졌다는(번식) 뜻입니다. 번식과 진화에 관한 한 생물권의 제1인자는 단연코 바이러스죠. 음악과 생물이라는 전혀 상반되는 듯한 두 분야의 용어가 만나서 서로의 핵심 주제를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나요? 

둘째, 예술작품도 숙주에 ‘기생’하는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숙주, 곧 인간 이 없다면 예술작품은 죽은 사물의 지위를 모면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과 마음속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예술작품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 감상자를 만날 수 없다면, 예술작 품은 새롭게 부활할 수 없죠. 앞서 언급한 그 성실한 관리인에게 비친 예술작품은 살아 있는 예술이 아니었습니다. 그 것은 한갓 오점이나 폐품에 불과했죠. 

 

이 경우 작품이 죽은 사물로만 남은 까닭은 감상자 역할을 못 하는 관리인에게 있을 수도 있고, 잠재적 감상자인 그를 감염시키지 못한 예술작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셋째, 예술작품도 인간을 ‘변모’시킵니다. 

자신의 유전물질을 숙주에 이식시킴으로써, 바이러스는 숙주를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죠.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에서 받은 커다란 감동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작품 을 만나기 전의 세계와 만난 다음의 세계가 달리 보입니다. 한갓 사물이나 평범한 제품이 아니라 진정한 작품이라면, 감상자의 삶을 변모시키기 마련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이러스는 숙주를 감염시켜 종국에는 파괴하는 존재이므로 예술 작품을 바이러스에 빗대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다는 지적이 나올법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죠. 2000년대 초반에 인간 유전체를 완전히 해독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 하나가 발견됩니다. 현생 인류 유전체 의 8% 정도가 ‘인간 내재성 레트로바이러스 (Human Endogenous Retroviruses, HERV)’로 밝혀진 겁니다. 레트로바이러 스란, 외가닥 RNA를 유전물질로 가지고 있는 동물 바이러스 가운데 이 RNA를 주형으로 이용하여 DNA를 합성, 곧 ‘역전사’하는 무리를 일컫습니다. 현재 환경에 존재하는 레트로바이러스는 대부분 사람의 체세포를 감염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 유전 정보의 엄연한 일원이 된 레트로바이러스의 조상은 생식 세포에 침입한 게 분명합니다. 적어도 1억 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옛날 감염에 성공한 레트로바이러스는 역전사 효소를 이용하여 DNA로 변신한 후에 숙주 유전체로 끼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여러분의 유전체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된 거죠. 오랜 세월 속에 대물림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생겨 바이러스는 원래 기능을 잃어버리고 인간 유전체로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HERV는 사람의 DNA에 통합된 이후에 숙주와 같이 진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 자면, 바이러스 유전자가 자기 증식 대신에 숙주 유전자 발현에 참견하게 된 거죠. 특히 유전자의 조절 부위에 작용하 여 여러 인간 세포 유전자의 발현 양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죠. 쉽게 말해서 마치 기계의 스위치처럼 근처 유전자 의 기능을 켰다 껐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변신한 HERV는 유전자 조절 요소를 추가로 제공하여 유전적 다양성을 증진함으로써, 인간 세포에 도움을 꽤 주었습니다. 또한, 일부 HERV는 산모 면역계가 태아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태아-산모 면역관용’에도 관 여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HERV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면 숙주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후성유전적으로, 즉 환경 요인에 의해 일어납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HERV의 일탈이 암과 자가 면역질환, 심지어 일부 신경질환의 발병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답니다. 

 

철학자와 미생물학자가 함께 도출한 결론 

 

고립된 상태에서 예술작품은 비활성 상태로 있지만 ‘숙주’인 인간을 만나면서 생명을 얻습니다. ‘작품이 살아 있다’ 혹 은 ‘죽은 작품이다’라는 표현은 이전부터 널리 사용됐는데, 그러고 보면 생태계처럼 예술계에도 생명과 죽음은 존재하 는 셈입니다. 

예술가가 처음 예술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라면, 감상자는 전염된 숙주로서 예술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 하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바이러스처럼 예술이 어디에도 깔끔하게 소속되지 않는 ‘경계(사이)의 존재 방식’을 가진다는 점은 이미 몇몇 철학자 들이 인지했답니다. 

 

일찍이 플라톤 (Plato, B.C. 427~347)은 감각적인 ‘현실세계’와 지성적인 ‘이데아계’의 경계로서 예 술을 이해하며,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는 예술을 ‘이론영역(필연)’과 ‘실천영역(자유)’의 경계, 그 심연과 같 은 지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네요. 두 사람 모두 쉽게 규정지을 수 있는 두 세계를 나누는 동시에 양자를 잇는 경계 ‘사이’에 아름다움과 예술을 위치시킨 겁니다. 한 번 더 베토벤을 소환합니다. 

베토벤 음악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우선 그것은 베토벤이 남긴 오선지에 음표로 존 재하겠지요. 그리고 그 음표가 곡 해석을 주도하는 지휘자와 연주자를 만나서 소리로 구현되어 감상자 개개인을 만납 니다. 음(音)만을 두고 말하자면, 하나의 악상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이’가 접히고 펼쳐지면서 하나의 절묘한 하모니 를 이루는 사건이 교향곡 (sym-phony)으로 탄생하는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경우 음악은 단순히 음들의 집합체 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지휘자, 연주자, 감상자 모두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살아 있는’ 인간 정신을 숙주로 삼지 않는 음악은 더는 ‘살아 있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영감을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예술작품이 어떤 고정된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이러스가 숙주 를 만날 때에만 잠시 생명을 이어가듯이, 예술작품은 살아 있는 인간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사건’을 뜻한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인간의 창조한 예술작품도 바이러스의 ‘시원적인 생태(生態) 모델’ 을 따른다는 점이 우리가 주목하는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이며, 바이러스의 존재 방식과 닮은 점입니다. 결국 ‘예술작품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단지 수사적 은유가 아니라 예술과 생명개념 사이의 구조적 동형성에서 나온 융·복합적 사유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자와 미생물학자가 함께 도출한 결론 고립된 상태에서 예술작품은 비활성 상태로 있지만 ‘숙주’인 인간을 만나면서 생명을 얻습니다. ‘작품이 살아 있다’ 혹 은 ‘죽은 작품이다’라는 표현은 이전부터 널리 사용됐는데, 그러고 보면 생태계처럼 예술계에도 생명과 죽음은 존재하 는 셈입니다. 예술가가 처음 예술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라면, 감상자는 전염된 숙주로서 예술의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 하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바이러스처럼 예술이 어디에도 깔끔하게 소속되지 않는 ‘경계(사이)의 존재 방식’을 가진다는 점은 이미 몇몇 철학자 들이 인지했답니다. 

 

일찍이 플라톤 (Plato, B.C. 427~347)은 감각적인 ‘현실세계’와 지성적인 ‘이데아계’의 경계로서 예 술을 이해하며,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는 예술을 ‘이론영역(필연)’과 ‘실천영역(자유)’의 경계, 그 심연과 같 은 지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네요. 두 사람 모두 쉽게 규정지을 수 있는 두 세계를 나누는 동시에 양자를 잇는 경계 ‘사이’에 아름다움과 예술을 위치시킨 겁니다. 한 번 더 베토벤을 소환합니다. 베토벤 음악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우선 그것은 베토벤이 남긴 오선지에 음표로 존 재하겠지요. 그리고 그 음표가 곡 해석을 주도하는 지휘자와 연주자를 만나서 소리로 구현되어 감상자 개개인을 만납 니다. 음(音)만을 두고 말하자면, 하나의 악상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이’가 접히고 펼쳐지면서 하나의 절묘한 하모니 를 이루는 사건이 교향곡 (sym-phony)으로 탄생하는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경우 음악은 단순히 음들의 집합체 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지휘자, 연주자, 감상자 모두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살아 있는’ 인간 정신을 숙주로 삼지 않는 음악은 더는 ‘살아 있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영감을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예술작품이 어떤 고정된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이러스가 숙주 를 만날 때에만 잠시 생명을 이어가듯이, 예술작품은 살아 있는 인간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사건’을 뜻한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인간의 창조한 예술작품도 바이러스의 ‘시원적인 생태(生態) 모델’ 을 따른다는 점이 우리가 주목하는 예술작품의 존재 방식이며, 바이러스의 존재 방식과 닮은 점입니다.

 

 결국 ‘예술작품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단지 수사적 은유가 아니라 예술과 생명개념 사이의 구조적 동형성에서 나온 융·복합적 사유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