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확실하게, BT인으로서의 성장하기
Date 2021-04-23 15:33:43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311
박현지
박사후 연구원
Emory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hyunji.park@emory.edu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국생물학회 소식지의 젊은 BT인란에 기고의 기회를 주신 관계자 여러분 및 강원대학교 이태진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내가 이런 글을 감히 쓸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과학에 관심을 갖고, BT인으로 성장해 온 과정을 이야기해보겠다.

 나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아주 많은 말썽쟁이였다. 한 번은 집에서 키우는 식물과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의 이파리를 전부 모아 맛을 보다가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고, 나 자신과 2살 터울의 남동생을 대상으로 제멋대로 임상시험을 하는, 부모님 속을 꽤나 썩이는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내 장래희망은 늘 바뀌었고, 어떤 날에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가 또 다른 날에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다가, 다른 많은 박사님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기보단 이것저것 전부 경험해보고 싶은 욕심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수학과 과학이라는 것은 늘 변함없었다. 누구나 동의하는, 정해진 답이 있는 문제들을 풀어내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과학 과목 중 가장 예측이 불가능하고 언제나 예외가 존재하는 ‘생명체’를 다루는 생물 과목을 가장 어려워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노형래 선생님을 만나면서 어떤 문제든 “가설, 변인, 통제” 세 가지를 찾아내는 연습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한 생물에서 균형과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며 생명공학과로 진학을 꿈꿨다.

 학부에 진학한 이후에도 나는 그다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학에서의 공부가 나를 생물공학이란 학문에 좀 더 빠져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문과 학생이었던 나는 이과 수업을 들었던 다른 많은 학생들과 달리 일반 생물학, 일반 물리학, 일반 화학 등의 1학년 기초과목조차 너무나 새로웠고, 두꺼운 전공 서적을 엮은이의 글부터 차근차근 소설책 읽듯이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을 좋아하기보단, 다양한 교내외 행사에 참여하여 hands-on 실습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을 더 좋아했다. 그 덕에 학부 3학년 때는 학과 산업기술아이디어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4학년 때는 보건복지부와 충청북도에서 주최한 실험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고, 학부를 졸업한 이후에는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기술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인턴생활을 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잘 몰랐다. 다른 선후배 동기들처럼 꿈을 정하고, 그에 맞게 수강 신청을 하거나 연구실에서 학부 인턴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기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 싶고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다 보니 착실하게 공부하고 직장에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들어간 친구들과는 달리 졸업 후 몇 년을 방황하며 보냈다. 그러다 바이오니아라는 회사에 취직을 해 R&D팀에서 유전자 추출 키트를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학부에서 배운 얕은 지식 만으로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면서 BT인으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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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연세대학교 생명공학과 조승우 교수님 연구실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각 대학의 교수님들과 연구실들을 조사하던 시기에, 마침 연세대학교 생명공학과에 갓 부임하신 조승우 교수님께 인연이 닿아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신임 교수님 밑에서 연구실 창립 멤버로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열정적인 교수님의 지도 하에 실험의 즐거움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일주일 치 실험을 계획하고 결과를 얻어내고 정리해서 발표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고, 타 연구실과 공동연구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흥미로운 연구 내용을 듣는 것이 행복했다. 때로는 실험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지도교수님의 격려와 주변 많은 선후배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박사 학위를 마치고, 2017년에는 한국 로레알-유네스코 여성과학자상 펠로십을 수상할 수 있었으며, 2018년에는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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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에모리대학교 Davis Lab 동료들과

 

 

 나는 미국 남부에 위치한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첫 1년을 보낸 후, 현재는 Emory University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내가 속한 의생명공학과는 Emory University와 Georgia Tech의 협동 프로그램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 연구실은 Emory에 위치해있지만, 지도교수님과 대부분의 대학원생은 모두 Georgia Tech소속이다. 두 학교 사이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자주 두 학교의 캠퍼스를 왕래하며 여러 다른 연구실과 공동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또한 미국 남부 사람들 특유의 여유가 학교와 연구실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동부에 위치한 학교들에 비해 비교적 덜 경쟁적이고 여유를 중시해서 개인의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추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Georgia Tech 의생명공학과 대학원 부학장이자 Children’s Heart Research and Outcomes Center (HeRO) 센터장이신 Michael E. Davis 교수님 밑에서 심장 기형아들을 위한 줄기세포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처음 연구실에 합류했을 때는 유일한 한국인이자 동아시아인 포닥인 내가 이 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었지만, 매우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연구실이라서인지, 아니면 교수님이 뽑은 사람들의 성향이 비슷해서인지 너무나 쉽게 연구실에 적응하고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디어를 가져가든 “Go for it, trust yourself”라 얘기하며 나를 지원해주시는 지도교수님과, 다양한 배경지식을 가진 연구실 동료들 덕에 새로운 실험 테크닉과 기술들을 익히며 연구에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찾게 되었다. 또 우리 랩은 연구 외에도 SmartHeart Program이라는 심장기형환자들과 그 보호자들, 주변 초중고등학생들을 위한 봉사프로그램 및 정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생명공학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연구자로서 내 연구 결과의 잠재적 수혜자에게 연구 성과를 설명하고 피드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내가 왜 의생명공학, 특히 줄기세포공학 연구에 헌신을 하고자 했는지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너무나 감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작년부터 코비드로 인해 환자들과의 대면 접촉이 금지되면서 1년 째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못하고 있지만, 백신 접종 이후에 다시 재개 될 봉사 프로그램을 기대하며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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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SmartHeart Program에서 환자 및 보호자들과 함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대학원을 다닐 때 나는 지도 교수님이신 조승우 교수님께 “제가 과연 박사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분기마다 한 번씩 던지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부족한 학생이 지금은 이미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독립된 연구자로 홀로서기를 위한 트레이닝을 받으며 나름 BT인으로 잘 성장해나가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대학원생들도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자신 있게 길을 걸어가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짧다면 짧고, 또 길다면 긴 경험을 바탕으로 나 또한 느리지만 확실하고 꾸준하게 (slowly, but surely) 나아갈 수 있는 연구자가 되고자 한다. 끝으로 긴 글을 읽어주셔 감사 드리며 모든 분들의 연구가 흥하시길 기원하겠다.